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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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의 예술세계

<초의전집> 5권 여록편(餘祿篇)에 실린 우록 선생의 ‘초의선사의 예술세계’라는 제목의 글에서 간추려 싣는다.

대체로 공자가 <仁>의 사상을 편 성인이었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가 예악겸전(禮樂兼全)이라 하여 禮에 못지않게 樂을 존중하면서 스스로 비파를 연주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 국문학의 비조(鼻祖)의 한 분이라 할 수 있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는 시인이자 교육자이며 정치가이면서 경세가였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가 거문고의 제작자이자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렇듯 옛 선비, 또는 오늘의 지성인들은 예술을 취향의 한 부분으로 혹은 멋스런 것만으로 보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필수 불가결의 요건으로 여겼다.
우리는 시, 서, 화를 삼절이라 자주 인용한다. 시 잘 읊고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칭송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시서화 삼절에 더하기를 가령 무용도 잘하면 사절이 되는 것이고 거기다 더하기를 판소리까지 잘 한다면 오절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초의선사 장의순의 예술세계는 그 범주를 어디에 설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주제다.
....중략, 일반적으로 불가에서는 시를 게송(偈頌)이라 하여 매우 근엄하게 다루고 있으며 여간 자신하는 것 아니고는 남기려 하지 않으며 또 그들은 시 쓰는 일을 시작불사(詩作佛事)라고도 하여 매우 경건하게 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의선사는 많은 글을 남겼는데 과연 그 내용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중략 초의선사의 서화예술은 해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관음상 또는 후불탱화(後佛幀畵), 그리고 여러 명찰에 있는 작품에서 보는 바, 존엄과 성실과 전통의 결정이라는 측면과 천의무봉 그 누구의 서법도 흉내 내지 않았다는 독창성을 지녔다는 측면과 소치 허유라는 거목을 길러낸 안목 등으로 구분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중략 우리는 우리의 선각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오무호악(悟無好惡)이라 했다. 깨닫고자 한다면 좋아 죽을 일도 미워 안달할 것도 없어야 한다 했다. 초의선사는 진정 다인이 되려거든 소순기(蔬筍氣)를 떨쳐버리라고도 했다. 겉치레가 무슨 소용이리오, 했다. 이태동잠(異苔同岑)이라, 비록 걷는 길은 다르다 할지라도 결국은 산봉우리에서 만나게 된다고 했다. 그것이 초의선사의 다도관이자 예술세계였다.

초의선사는 시, 서, 화, 차에 이어 탱화와 단청, 범패, 바라춤, 그리고 채소류로 만들 수 있는 사찰 음식 만들기 까지, 불가사의 하리만큼 재주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초의선사는 잡기에 능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행방을 알 수 없지만 초의선사의 기록서 <군방보(群芳譜)>라는 책에는 승복의 침선법, 사찰음식 조리법, 난을 가꾸는 법, 조경법, 질병을 치료하는 투약법, 역술, 택일법, 목공법, 도요법 등, 오늘 날 생활백과사전 역할을 하는 기록이 적혀있다. 시, 서, 화에 재질이 있는 것은 어린 날부터 누군가에게서 글을 읽고 시를 짓고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자란 때문일 것이라 짐작하며, 탱화, 범패, 바라춤, 단청 등은 운흥사로 출가한 후 벽봉스님으로 부터 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남 대흥사를 비롯하여 인근 사찰에 소장되어 있는 탱화의 거의 대부분이 초의선사 작품인 것으로 봐서 그의 화격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절에서는 <탱화불사>라 하여 중이 불화에 종사하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으며 그것은 불심에 재주가 겸비되어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남아있는 탱화 중에 대흥사 박물관 소장인 <사십이수관세음보살상>은 문화재로 지정된 걸작이며 대흥사의 대광명전과 보련각에 있다. 그 탱화들은 지금도 그 문양이 선명한 것으로 미루어 재료의 선택과 시공의 성의가 얼마나 정밀했었던가, 깊이 연구해 볼만하다.

초의선사의 서예는 자유자재, 어느 서체에 속한다고 딱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초의집>이나 <동다송> 등의 글씨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친 듯 하면서도 자연스런 멋이 풍겨 나온다. 격을 따지지 않은 듯 거침없이 써 내렸지만 전체의 짜임이 순수하다. 특히 만년의 글씨는 거침없는 중에 순수함과 노숙함의 경지가 깃들여 있다. 절세의 명필 추사와의 교분 중에 어쩌면 그의 서체를 본받았을 법한데도 추사의 서체는 엿 볼 수 없음이 기이하다. 글씨에 그 사람의 인품이 스며든다고 했다. 초의선사의 글씨가 순수, 거침없는 것은 산속 깊은 곳에서 잿빛 가사를 입고 생활하며 작의적인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품 때문이 아니었나,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초의선사의 화(畵)는 누구에게 가르침 받았을까.
정확하게 아는 이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린 시절 동네의 서당에 글씨 잘 쓰고 시 잘하고 그림 잘 그리는 선비가 있었거나 부친이나 조부 중 누군가가 그쪽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따름이다. 단지 남아 있는 선사의 작품들이 비범한 솜씨 인 것은 사실이다. 현존해 있는 초의선사의 글씨는 몇 권의 시집을 포함 여러 방면으로 찾을 수 있으며 단청으로는 대흥사의 ‘대광명전단청(大光明殿丹靑)’ 등, 그림으로는 ‘강진의 다산초당 원경’ ‘다공양도(茶供養圖)’ ‘42수관세음보살상(42手觀世音菩薩象)’ 달마산 미황사 응진당내부의 ‘나한도(羅漢圖)’, ‘관세음보살상’ ‘일지암도’등이 있다. 여기서는 서화평론가 손병철 선생이 쓴 ‘일지암도’에 대하여 알아본다.

...중략, 진경산수에 속하는 이 그림은 초묵화(焦墨畵:담묵을 쓰지 않은 짙은 먹그림)처럼 보인다. 비록 소폭 그림이지만 준법이 치밀하고 전체적인 작품구성도 뛰어나다. 축대를 높이 쌓은 초당 뒤로 또 한 채의 기와집 정자가 보인다. 토담인 듯 한 담장 밖 뒷산 기슭에는 작은 능선을 타고 갖가지 수목들이 울창하고 그 위로는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다시 그 뒤로 두륜산 원경이 하나의 흐릿한 선으로 아득하다. 직접 해남의 대흥사를 찾아 본 이는 알겠지만 운해 속 구름다리를 건너지 않고서도 두륜산 자락에 감싸인 일지암은 영락없이 산정무진(山情無盡)의 한폭 남종화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더없이 조촐하고 그윽한 풍치에서 선승의 산거 생활의 이상을 물씬 느낄 수 있게 한다. 그 의경(意境)이 초의선사 자신의 것이고 보면 정경합일(情景合一)의 ‘일지암도’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불이선(不二禪)을 필묵예술로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 것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 그 ‘일지암의 구경’을 터득하엿다는 선인들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이 그림 한 폭으로 여실히 증거한 셈이 된다. 추사가 제주에서 초의선사가 손수 법제하여 보내준 차를 마시며 서화에 정진하였듯, 그도 여기 일지암에서 다선(茶禪)과 더불어 유어예(游於藝) 정신으로 시, 서, 화 삼절의 필묵경영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의선사는 이선래의(二禪來義), 사변만어(四辨漫語), 초의선과(艸衣禪課) 등의 경서 말고도 시집을 두 권 남겼다. 그의 생애에 대략 180여 편의 시를 썼다고 전한다. 180여 편의 시는 순수시만을 말한 것이며 그 외에 선사의 글은 분야를 넘나들고 있다. 즉, 제문이나 상량문, 불교에 관계하는 글, 또는 서문이나 발문 등을 합치면 사는 동안 참으로 많은 글을 썼다고 보아진다. 거기에 덧붙여 <다신전>과 <동다송>도 이를테면 오언절구나 칠언절구의 시문형식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시를 매우 근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불가의 스님이 시를 쓰는 작업을 시작불사(詩作佛事)라고 하며 유가의 선비들 못지않게 매우 소중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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