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다맥

본문 바로가기

대흥사 다맥

대흥사 다맥

대흥사(大興寺)의 다맥(茶脈)

국토 최남단 두륜산 줄기에 자리하고 있는 거찰 대흥사는 가련봉과 두륜봉을 최상봉으로 고계봉, 도솔봉, 혈망봉, 향로봉 등 여러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골짜기가 한 줄기로 모여 펼쳐진 넓은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때문에 사방을 산줄기가 감고 있어서 쉽게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절이다. 두륜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곳 대흥사는 호국불교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이다.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대흥사로 정착된 대흥사의 창건과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는데 수룡(岫龍)과 초의(草衣)가 편집하고 기어(騎魚), 호의(縞衣)가 교정하여 옛 기록을 종합한 [대둔사지(大芚寺誌)]가 있다.

[만일암기]의 기록은 송문제(宋文帝) 원가(元嘉) 3년(백제 久彌帝王 7년, 서기 426)에 신라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 그 뒤 양무제(梁茂帝) 천감 7년(백제 무령왕 8년, 서기508)에 이름 전해지지 않는 선행비구가 중건(重建)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신라 헌강왕 원년(서기875년)에 도선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 500개의 사찰을 짓는 것이 좋다고 상소하여 대흥사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적혀 있다.

[죽미기]의 기록은 양 천감 13년(신라 법흥왕 1년, 서기 514)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둔산조(大芚山條)에서 대흥사 앞마당에는 고려 때 스님 신암(信菴), 총은(?隱), 성유(性柔) 세 부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세 스님의 행적은 알려진바 없지만 고려 시대 살았던 스님의 부도가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고려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보아야하고 혜장의 주장대로라면 신라 말기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대흥사를 이야기할 때 맨 처음으로 꼽을 수 있는 분은 청허당 서산대사다. 서산대사로 인하여 대흥사가 일약 대 도량으로 중흥할 수 있었다. 서산대사는 임란에 승병을 일으킨 분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7년 동안이나 계속된 전란이었던 바, 유생들은 공리공론에 빠져있었고 당쟁으로 인하여 여러 갈래로 찢어진 관군은 전장에서 속속 패했다. 이 때 나라의 위기를 좌시할 수 없었던 서산대사가 호국의 기치 아래 승군을 일으킨 것이었다.

서산대사는 서기 1520년 조선 중종 15년에 태어났다. 속성은 최씨이며 완산이 본이다. 자는 현응(玄應), 이름은 여신(汝信), 호는 청허(淸虛)이며 오랫동안 묘향산에 머물러 있어서 서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휴정은 스님의 법명이다.

서산대사는 1601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친 후 제자 사명당과 처영 스님에게 ‘대흥사는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이니라 나의 의발(衣鉢)은 대흥사에 전하거라’ 말한 후, 자신의 영정을 꺼내보며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말했다 전한다.

유언을 따라 서산대사의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에 안치하고 영골은 수습하여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하고 금란 가사와 발우는 대흥사에 봉안했다.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에 옮겨지면서 대흥사는 선교의 총본산이 되었고 대흥사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를 배출해 선교양종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선(禪)과 교(敎)의 문제를 대흥사 나름으로 해석할 만한 대흥사 중심의 불교 인물들이 속출하였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1788년 대흥사의 계홍과 천묵 스님이 서산대사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대흥사에 서산대사의 뜻을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사당을 세워달라는 탄원서를 올렸고 임금은 표충(表忠)이라 편액을 하사하여 사당을 건립케 하였다.

다음은 [다성 초의선사와 대흥사의 다맥]에서 서산대사가 대흥사에 주석한 시기를 알고자 여러 문헌을 열람한 후 쓴 임혜봉 스님의 글을 참고로 대흥사의 다승, 다시를 알아본다.

홍문관 수찬(修撰)송익효(宋翼孝)가 지은 제문에는 ‘머물던 옛 절(故境) 웅대한 사당 지어’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경(故境)이란 청허스님이 머물던 대흥사를 이른다. 이로 미루어 보아 청허스님이 대흥사에 주석한 일은 사실로 입증되었지만 스님이 머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중략

청허스님은 다시 9편과 차를 언급한 서신 1편을 남겼다. 청허스님이 차를 마시고 음다풍을 익힌 것은 스님이 지리산의 여러 사찰과 대흥사에 머물던 때로 추측된다. 청허스님이 대흥사에 주석할 당시 해남 두륜산에서 ‘차’가 재배되고 있었으므로 대흥사에는 차를 만들어 마시는 음다풍이 일상적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이는 청허스님 이래 대흥사에 주석한 고승과 석덕들이 남긴 다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어쨌든 대흥사에 머물게 된 것을 계기로 청허스님은 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흥사의 다풍을 다시로 남겼다.

...중략 대흥사의 13대종사 가운데 7명이, 13대강사 가운데 2명이 다시를 남겼다. 즉, 13대종사 가운데 3대 월저도안(月渚道安1638~1767) 대종사가 1편, 5대 설암추붕(雪巖秋鵬1651~1706)대종사가 10편, 6대 환성지안(喚惺志安1664~1792) 대종사와 9대 상월새봉(霜月璽?1687~1767) 대종사가 각각 1편, 11대 함월해원(涵月海源1691~1770) 대종사가 4편, 12대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대종사가 5편을 남겼으며 13대 초의의순(艸衣意恂1786~1866) 대종사가 25편29수 외에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 그리고 차와 관련된 산문 2편을 남겼다. 또한 13대강사 가운데에는 12대 아암혜장(兒庵惠藏1772~1811) 대강사가 5편8수, 13대 범해각안(梵海覺岸1820~1896) 대강사가 29편의 다시 외에 차와 관련된 산문 1편을 남겼다.

대흥사의 13대종사나 13대강사는 아니지만 다시를 남긴 대흥사의 스님이 있는데, 초의선사 보다 5세 아래인 철선혜즙(鐵船蕙楫1791~1858) 스님이 3편, 대흥사에서 출가하여 초의선사에게 보살계를 받은 보제심여(菩濟心如 1828~1875) 스님이 2편,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송광사와 대흥사에서 활동한 금명보정(錦溟寶鼎1861~1930) 스님이 60여 편을 남겼다. 이들 스님 외에 일제 강점기에 대흥사에서 출가하여 오랫동안 주지를 역임하며 차 보급에 앞장 선 응송 박영희(應松 朴暎熙 1892~1990) 스님이 차에 관한 저술을 펴기도 했다. 아울러 다시나 차에 관한 저술은 없지만 초의선사의 법과 다맥을 이은 이로 서암선기(恕庵善機1812~1876) 스님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소치허유(小癡許維 1809~1892)가 쓴 몽연록(夢緣錄)의 기록과 현재(2002년 3월) 범어사 미륵암에 주석하고 있는 청량백운(淸凉白雲1934~)스님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주소 : (536-807)전남 해남군 해남읍 중앙1로 115(2층).     전화 : 061-535-0986     팩스 : 061-535-0984
Copyright © www.hntea.kr All rights reserved.